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있는 것들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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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있는 것들에 관하여
  • 교통뉴스 한명희 기자
  • 승인 2017.02.14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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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연 카피라이터 <삶은풍경이라는 거짓말, 단어의 귓속말>등 출간
<문 화>
 
산 걸까, 죽은 걸까?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물에 잠긴 여인은.
「UNDERCURRENT」 커버사진은 물과 여인으로 하여 기묘하다.
호기심으로 빚어진 물음은 ‘누구지?’ 보다는 ‘어째서?’로 향한다. 몸이 처음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듯이.
매일 마시고 접촉하는 일상적 물질. 이 익숙한 물이 어느 순간 두려운 대상으로 둔갑한다.
더없이 보드랍지만 침범하기 어려운 신비와 향방을 알 수 없는 적의를 품은 암암한 세계로 느껴지는 순간에 말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의 빛깔은 장막으로 가려진 물체처럼 미지의 공포다.
마치, 삶이 표류 혹은 부유하다가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고 삼켜지는 존재로 ‘나’를 인식시키고, 끝내 이 지리멸렬한 생 가운데서 허망한 감정을 정면으로 응시하도록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Bill Evans와 Jim Hall의 다름으로 빚어진 하모니
물이 던진 두려움에 움찔하여 커버사진에서 불길한 징후를 감지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다. 보면 볼수록 두려움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이 다가온다.
물에 안겨 보호 받는 듯이. 이 아름답고도 기묘한 사진은 물이라는 물질과 공간이 품은 밀도, 부력, 빛깔, 흐름을 절묘하게 포착했다.
 
절묘함은 사진에서뿐 아니라 재즈 뮤지션인 빌 에반스와 짐 홀의 듀엣 연주에서도 고스란히 표출된다.
세상에! 이렇게 달콤하면서도 우아한 앙상블이라니. 단박에 귀를 사로잡는다.
 
Bill Evans, Jim Hall / Undercurrent (1962) / United Artists Records
‘암류’를 뜻하는 ‘Undercurrent’는 물 바닥의 흐름 또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아니하는 불온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피아니스트인 에반스와 기타리스트인 홀의 앙상블인 암류는 불온함마저 흐름에 섞어버린다.
 
탁류도, 격류도 아니다. 물이 그러하듯 유연하게 어우러지는 조화다. 불미스런 것들마저 가만히 안는다. 둘은 자유롭게 유영하듯 피아노로 기타를 어루만지고, 기타의 울림으로 피아노의 두드림을 보듬는다.
 
가까워졌다가 때로 멀어지고, 슬쩍 물러섰다가 바투 다가선다. 서로를 온전히 탐닉하고 생생히 감각하는 연인과 같다.
 
거장 뮤지션 두 사람의 앙상블은 함께 공연한 적이 없다는 사실마저 믿기지 않게 한다. 그 당시에 쏟아진 감탄처럼 ‘정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이들의 소통은 완벽’에 가깝다.
여섯 곡으로 이뤄진 앨범은 둘의 만남, 즉 궁극의 자리에 오른 피아니스트와 기타리스트가 만났다는 점에서 이미 명반의 탄생을 예감시켰다. 이들이 같은 시기에 미국 매사추세츠 ‘The Lenox School of Jazz’ 교단에 섰으니 둘의 협업은 도래할 운명이었다.
 
게다가 5년에 걸쳐 ‘건반 음악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J. S. Bach의 <평균율 클라비어> 전곡을 녹음한 ‘Modern Jazz Quartet’의 리더이자 피아니스트인 John Lewis도 둘과 함께 재직했다.
이런 까닭에 존 루이스와 더불어 두 사람을 재즈에 클래식을 포개려는 시도를 지속했으며, 그런 시도는 그들을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대표 아티스트로 기억시켰다.
 
암류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앨범은 피아노와 기타라는 단출한 악기 편성이면서도 물 흐르듯 편안하면서 깊고 풍부한 밀도로 채워졌다.
 
단단한 토대에 쌓아 올린 두 사람의 세련된 연주와 클래식적 재능은 듀엣이 지닌 단순함마저 가뿐히 지워버렸다. 빼어난 리듬감과 스토리를 지닌 에반스, 울림의 여백과 탐미적인 스타일을 보이는 홀의 연주는 우리를 깊고 먼 곳으로 인도한다. 귀를 뗄 수 없는 세계로.
 
또 다른 매력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면서도 치열하게 다투고, 차분하지만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는데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개성과 리듬, 고유한 매력을 유지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쩌면 앙상블이란 힘들이 불화를 겪고 난 뒤에야 드러나는 모습일지 모르겠다. 겉으로는 고요한 물의 깊은 곳 암류처럼.
 
연주에 빠지면 빠질수록 사진으로 눈이 돌아간다. 참지 못하고 레코드 커버를 펼쳐 사진작가 이름을 확인한다. 업계 밖까지 실력이 알려진 사진작가 Toni Frissell이다.
 
Toni Frissell / at Weeki Wachee Springs, Florida (1947)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여성 사진작가 토니 프리셀과 Nan Goldin
1907년 미국 맨해튼에서 태어난 프리셀은 사진작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녀는 패션사진으로 부유한 삶이 드러내는 유희적이면서도 세련된 관능을 독특한 시선으로 포착하는데 능숙했다.
「UNDERCURRENT」 커버사진은 그녀가 1947년 패션 잡지사인 ‘Vogue’에서 해고된 후 찍은 것. 미국 플로리다 ‘Weeki Wachee Springs’에서 촬영한 작품으로 흐르는 물이 지닌 뉘앙스를 표현하려 모델에게 드레스를 입혀 입수시켰다고 한다.
 
프리셀의 장점은 쉽게 찍은 듯한 편안함에 있다. 사진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개나 여우사냥, 어린아이 혹은 전쟁터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패션사진조차도 스냅사진 찍듯 경쾌하게 셔터를 눌렀다. 그녀는 기존 사진이 지닌 전통적 구성에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특기인 찰나를 포착하는 스냅의 즉흥성을 거기에 포갰다. 단단한 구성에 쌓아 올린 즉흥성은 사진을 새롭고 흥미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결혼사진처럼 부자들의 매혹적인 생활을 기록했던 그녀는 옷과 모델도 좋아했으며, 야외에서는 연출과 햇빛을 활용해 자신만의 독보적 스타일을 구축해냈다. 이러한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느낌과 표현은 ‘보그’나 ‘Harper's Bazaar’와 같은 유명 패션 잡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렇게 제 취향을 쫓으면서도 사회를 향한 관심도 놓치지 않았다. 전쟁터로 나가 사진을 찍었으며, 스튜디오에 익숙한 모델을 현실세계인 삶 가까이로 데려간 것도 그녀였다.
비록 취향은 고급 문화를 누리는 소수 계층의 삶과 문화를 향했지만 그녀는 사회와 구성원을 향한 시선과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프리셀과 달리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사진에 담은 낸 골딘이 떠오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다.
얼굴에 멍 가득한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으로 잘 알려진 골딘. 그녀는 80년대 미국 사회에서 극단적인 삶을 사는 게이, 레즈비언, 여장 게이, 마약 중독자, 에이즈환자 등 사회적 소수자와 소외자를 피사체로 삼았다.
 
그들은 골딘과 함께 살아가는 친구이기도 했다. 아웃사이더였던 그들 삶이 피사체가 되고, 작품이 되어 사회의 한 단면을 도려내듯 날카롭게 보여주었다.
그녀 사진은 적나라하고 야하다. 하지만 몸의 열락은 곧 시들고 불안과 맞닥뜨린다. 막 사랑을 나눈 연인에게서조차 달뜬 행복과 육체 너머의 불완전한 삶의 배후가 기웃거린다.
 
처음 그녀 사진을 접하면 에로틱한 피사체에 끌려들지만 이내 이면에 웅크린 진실과 마주쳐 얼굴이 붉어진다. 마치 벌거벗은 자신을 들킨 것처럼 화끈거린다.
 
들리고 보이는 것, 그 너머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찍은 사진은 가혹하고 단도직입적이다. 사랑이 언제나 아름다운 세계에만 머물지 않듯 삶도 때때로 불행과 불운이 엄습함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잠망경을 올려 밖을 살피는 잠수함처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현상 너머를 보려 했다. 그녀 사진에 등장하는 사랑과 관계는 어딘가 쓸쓸하고, 열정과 분노로 부들거린다.
 
그녀는 감정까지 사진으로 포획하려 했고, 실제로 필름으로 잡았다. 뜨거움을 가장한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진실이 그녀 사진에서 신음하며 꿈틀거린다.
 
11살이던 해에 자살한 친언니에 대한 기억이 흐르는 시간만큼씩 사라지는 걸 아쉬워하던 그녀는 카메라를 들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생활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열 네 살 때 가출을 감행했고 열 여섯이 되었을 때 여장 게이와 생활하며 그들과 삶을 사진에 담았다. 성관계나 목욕 같이 사적인 상황들까지.
 
그녀는 피사체 가까이로, 아니 그들 삶 깊은 곳으로 추적해 들어갔다. 다가가야 보이는 희미한 것들을 찾으려는 듯이. 현대 사진가들 가운데서 ‘피사체 가장 가까이로 다가간 사람’이라는 평판이 생긴 건 우연이 아니였다.
 
Nan Goldin / Nan one month after being battered (1984)
1984,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셀프 포트레이트로 찍었다. 남자친구 브라이언에게 구타를 당하고 한 달 뒤 일이다.
비참한 몰골을 기교 없이 담아낸 스트레이트 사진. 시간이 기억을 좋은 모습으로 왜곡시키지 못하도록, 되돌릴 수 없는 한 순간을 온전하게 기억하려고 말이다.
사랑이든 관계든 늘 매혹적이지만 않다는 걸, 어떤 순간에 낯선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걸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친구가 나를 때렸던 한달 후에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었던 건 이 일에 향수를 섞지 않고 기억해 내고 싶어서였다. 기억은 변질되는 오류의 덫에 자주 걸려든다.
나의 셀프 포트레이트는 어떤 체험을 확고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고 과정이다.”
 
커버사진에서 비롯된 호기심이 어째서 이렇듯 멀고 먼 세계로 번졌을까?
각자 고유한 개성과 철학을 깨트리지 않고도 멋진 협연을 들려준 빌 에반스와 짐 홀, 그리고 사진으로 사회와 사람 그리고 관계의 속살을 탐험했던 토니 프리셀과 낸 골딘에게서 조화와 불화 가운데 우리가 있다는 걸 듣고 본다.
조화는 불화 속에서 움트고, 불화를 통해 조화를 향한 균형 추가 조금씩 움직이리라. 그러니 불화를 두려워하거나 애써 조화를 향할 필요는 없지 싶다.
 
음악이 들리는 것 그 이상을 들려주고, 사진이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에 눈과 귀를 피하지 말아야겠다.
주의 깊게 듣거나 보지 않고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은 오래도록 그랬듯이 정체를 감출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보고 듣는 속은, 너머는 미비하기 짝이 없을 뿐이고.
 
이들처럼 서로를 인정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고 듣는다면 세상이 조금쯤 나아질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든 지금에.

 

김기연 카피라이터 <삶은풍경이라는 거짓말,  단어의 귓속말>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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